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문단 편집) == 평가 == [[파시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독재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도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이웃나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랑코와 살라자르는 꽤 친했다고 한다. ~~[[유유상종]]~~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살라자르가 프랑코를 지지했던 것도 있고, 내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추축국 편을 드는 듯 안 드는 듯 간보는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고수하였으며 [[중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해 망명 온 중남미인들을 송환시켰던 것도... 그러나 내전기와 내전 이후에도 자국민 수십 만명을 처형하였으며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켜 탈출을 법으로 금지하고 [[연좌제]]를 시행하는 등 스페인 전역을 피로 물들인 프랑코와는 달리, 살라자르의 독재정은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이긴 했지만 프랑코에 비해 온건했다. 실제로 반 살라자르 야권의 거두였던 [[포르투갈 공산당]] 3대 당수 알바루 쿠냘만 하더라도 [[콩밥]]은 오래 먹었지만 [[사형]]은 당하지 않았고[* 포르투갈은 [[1867년]]부터 사형제도를 폐지한 상태였다. [[1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군법에 한해 사형을 부활시켰지만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제 폐지는 그대로 유지했고 독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완전 폐지는 [[1976년]]) 반면 비슷한 시기 스페인 공산당의 당수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프랑코를 피해서 [[소련]]에 [[망명]]해 있었다.], 한때 손을 잡았지만 사이가 틀어진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 역시 국외추방시키는 선에서 처리했다.[* 프레투는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파시즘 사상을 버렸고 귀국을 허락받아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며 [[말년]]에 [[카네이션 혁명]]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자국민들이 탈출했을 땐 체포하지 않는 대신 국적 박탈을 하는 수준에서 끝내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해빙 무드를 타 비록 손발은 꽁꽁 묶어 두었지만 제대로 된 [[야당]]의 형성 또한 몇 년간 허가한 적이 있다. 물론 몇 년 뒤에 다시 금지했지만. 스페인은 실제로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사형을 [[프랑코 정권]] 말엽까지 지속했지만, 포르투갈의 경우 대대적으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또 외교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아(...) 스페인의 프랑코 같은 강력한 억압 통치를 한 것도 아니면서 30여년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살라자르 정권에서 수혜를 입었던 가톨릭 교회측도 지지 세력 중 하나였다. 덕분인지 2007년 포르투갈 국영방송사 [[RTP]]가 시행한 '''위대한 포르투갈인''' 설문조사에선 [[인판트 동 엔히크]],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등 [[대항해시대]]를 연 세계사적 위인들이 포함된 20명의 최종 후보들 중 4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독재자를 포르투갈 최고의 위인으로 선정한 꼴이니... 당연히 이로 인해 RTP 이미지도 나빠졌다.] 물론 이런 설문조사가 으레 그렇듯 현대 정치인이 포함되면 진영 논리가 작용되어 이전 위인들이 배제되는 경향도 있는건 감안해야 된다손 치더라도 꽤나 충격적인 결과. 그리고 재미있는건 이때 2등을 한 인물은 살라자르 정권기 [[반정부]] 인사 중 최대 거물이었던 [[포르투갈 공산당]] 당수 [[알바루 쿠냘]]이었다. 더 재미있는건 라이벌 민간 방송사 SIC에서도 설문조사를 했는데, 내용은 '''최악의 포르투갈인'''. 여기서도 둘은 나란히 사이좋게(?) 1위 살라자르, 2위 쿠냘이 차지했다. 즉, '''위대한 포르투갈인과 최악의 포르투갈인 모두 1등'''을 차지한트바 있는 웃픈 인물.(...) 의외로 부정축재가 일상인 독재자들과 달리 검소하게 살았다. 사저만 해도 방 세개 짜리에 불과했고 관리인, 가정부 둘만 두거나 직접 [[석탄]]을 나르고 땠다거나(...) 하는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일반 중산층 수준으로 살았던 셈이었다. 민주 국가에서도 지도자가 부유하게 사는 경우는 수두룩한데 국정 전반을 쥐던 독재자인 그가 독재자로써 쉽게 빠지는 길인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긴 하다.[* 물론 동시대 집권한 소련의 [[스탈린]]도 철혈통치자란 악명과는 달리 개인적인 부의 축재나 사치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어 옷을 수수하게 입고 다니고, 받은 월급도 책상 서랍에 그냥 넣고 다니는 등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아예 없는 사례는 아니었다. --그래도 공산당 지도자로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 이런 것을 보면 부의 축재에는 큰 관심이 없되 권력에는 집착했던 유형의 인물이라고 보면 될듯하다.] 경제 문제로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를 살라자르보다 상대적 고평가하는 일각의 의견도 있는데, 어차피 둘 다 도긴개긴이긴 하다만, 애초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적 역량 자체가 다른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엉망이던 시절이라 해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2류 국가일지언정 나름 열강 취급받던 스페인과 달리[*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과 [[아스투리아스]]의 철광업, [[바르셀로나]]의 [[금융]]업은 스페인이 삼류 국가 소리 듣던 [[20세기]] 초반 시기조차도 유럽에선 알아 주었을 정도였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가 끝나자마자 진짜 3류 국가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즉, 스페인은 원래 잠재력은 충분했는데 내전이나 프랑코의 집권 초중기 경제 삽질 등 내부적 문제로 삐거덕거리던게 늦게 발휘된 것이고, 오히려 장기적인 성장률은 1차 산업으로 살라자르 치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스페인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다만 살라자르의 경제정책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워낙 1, 3차 산업에 치중하다 보니까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물론 살라자르도 바보는 아니니 철강, 기계 제조업 분야에서 기업들을 육성하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결국 당시 제조업은 경공업 위주로 발전했으며 상당수가 국영기업이었던 이 기업들이 [[1980년대]]에 [[민영화]]되면서 상당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팔려나갔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글로벌 생산 차원에서 비중이 미미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포르투갈 내 생산시설을 폐쇄하면서 제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게 [[유로화 사태]] 당시 포르투갈에 치명타를 입혔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비해서도 회복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았으니 틀린 주장은 아니다. 다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회복되기는 해서, 청년실업률에서나 경제적인 수치에서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기는 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의 청년실업률이 30-50%대를 넘나들 때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고 급기야 [[1980년대]] 이후 재정적자가 가장 적을 정도라서 브라질이나 앙골라가 원자재값 하락으로 다시 침체에 빠지면서 빠져나갔던 인재들이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다만 포르투갈의 청년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든 국내보다는 같은 [[유럽연합]] 안에서 일자리가 있는 [[영국]], [[독일]], [[룩셈부르크]] 등지나, 말도 통하고 한참 고도성장 중인 과거 식민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의 해외로 나간 결과다보니 실제 경제 상황과는 괴리가 있다. 고급인력이 부족한[* 앙골라 같은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포르투갈 본토보다 나았던 적도 있었지만 독립 직후 오랜 내전과 쿠데타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들과 현지 자체 인력들이 거진 갈려나간 적이 있었다. 물론 앙골라도 독립 직후 백인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반강제적으로 추방한 것도 크다.] 앙골라 같은 곳으로의 이주민은 불과 10여년 전 몇백 명 수준이었던 게 2010년대엔 만 단위를 넘고 있는 상황일 정도. 동시대의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선 여러모로 온건했지만, 엄연히 독재자였던만큼 포르투갈 현지의 옹호자들처럼 일방적인 고평가도 곤란하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국]]의 명배우 [[제러미 아이언스]]가 출연했다.]나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 행진하는 청춘, 호스 머니를 보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프랑코 수준으로 반대세력을 당장 공개처형하지 않아도 인생 조지는 방법은 참 다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례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마노엘 드올리베이라]]는 살라자르 때문에 그나마 움트려고 하던 경력이 단절될 뻔했다. 당시 포르투갈 뉴웨이브 감독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말 안해도...] 다만 옆동네 프랑코가 하도 피비린내 나게 굴어서(...) 주목을 덜 받는 것뿐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이 겪고 있는 개고생의 대부분은 이 사람이 뿌려놓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소위 '지도상으로만 서유럽이지 사회 인프라, 경제 발전은 [[동유럽]]' 소리 듣는 이베리아 반도의 현재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프랑코와 별반 차이 없다. 다만 굳이 좋게 평가한다면 프랑코 정권에 비하면 그나마 확실하게 폭력적인 탄압은 하지 않아서 장기적인 국론 분열의 정도는 덜했으며, 근현대 정치사상 몇 안되는 군사 정권의 힘으로 집권해 오히려 그 국가의 강제력을 총괄하는 군인들을 팽하며(...) '''민간 독재'''를 형성했을 만큼 개인적인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보다 한 술 더 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며 직계 자손을 남기지 않았는데 이 점을 보면 공화국에 대한 애착과 권력 세습에 대한 반감은 살라자르가 아타튀르크보다 훨씬 강했던 듯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